지옥과 천당 오간 4년 死闘… 대미 스웨터 덤핑 제소 무혐의 승소 비화

잊을 수 없는 역사의 팩트…30년 전 추억의 그 사건

89년 9월 美 업계 제소 · 업계, 단체, 정부 총력 대응 승소 쾌거
당시 박성철 대책위원장 주도 52억 각출 · 美 최대 로펌 선임 적중
매일 대책 회의 美로펌 · 한국 삼일회계법인 철저히 준비 성공

정부통상팀 주미 상무관실, 대책위 단체 일사불란 총력 대응 결과
한국만 무혐의 대만·홍콩 고마진 보복 관세에 스웨터 산업 폭망
오늘의 니트 수출 大國 있게 한 원동력, 정부 통상정책 교본 역할
어려울 때 업계·단체·정부 차돌처럼 뭉쳐…지금은 그런 풍광 없어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역사는 과거의 거울이다.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 하지만 역사에서 교훈을 못 얻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섬유 수출 역사 60여 년을 돌이켜봐도 새겨야 할 역사의 교훈이 많지만 아무런 의식 없이 망각하고 있다.

이 땅의 빈곤퇴치 주역인 섬유 수출이 걸어온 도전과 성취의 과정은 행운도 있었지만 수많은 간난과 신고의 치열한 여정이었다. 때로는 절체절명의 위기도 많았고 이를 극복하는데 업계 지도자의 헌신적인 노력과 희생이 되따랐다. 정부와 업계, 단체가 위기 경보 때마다 차돌처럼 단단한 혼연일치가 돼 난마처럼 엉킨 실타래를 풀어갔다. 태풍 속 편주(扁舟) 처지가 된 오늘의 상황에서 “죽건 말건 알아서 하라.”는 식의 방관자적 상황에서 그런 풍광을 상상하기 어렵다.

산업 환경과 수출 여건이 어려울수록 업계와 단체, 정부가 하나가 돼 대응하면 극복 못 할 위기는 없다. 실제 지금은 역사가 됐지만 의류 수입국인 미국의 무자비한 수입규제를 위한 통상 압력을 업계와 단체, 정부가 똘똘 뭉쳐 극복한 성공적인 쾌거는 지금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수입국의 독선과 횡포에 계란으로 바위 치기로 맞짱을 뒀던 스웨터 수출 업계가 미국의 무서운 덤핑 제소에서 승소한 사실은 상상 이상의 성과였다. 당시 스웨터 업계의 덤핑 제소 승소는 해당 품목뿐 아니라 한국산 의류 제품의 연쇄 제소를 막아 오히려 수출 활성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정부의 통상 정책의 기본 매뉴얼이 될 정도로 통상 정책 교본이 되기로 했다. 업계 지도자의 탁월한 통찰력과 예리한 판단력, 신중하면서도 지혜로운 전략이 미국 제소자 측 공룡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이다. 섬유산업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이 시점이지만 우리가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한다는 좌표를 제시하는 시사점이 크다는 점에서 그때 그 사건의 비화를 회고해본다.

30년 전 청천벽력 한국산 스웨터 덤핑 제소

지난 89년 9월 22일이었으니까 만 30년 전이다. 다자간 섬유협정에 근거한 MFA로 섬유 수입국과 수출국은 쌍무 협정을 통해 섬유 쿼터제가 실시될 전성기 때다.

국내적으로는 전두환 정권의 신군부에 의해 의류수출조합과 스웨터·메리야스 3개 수출조합이 한국섬유제품수출조합으로 통합돼 8년이 지난 때였다. 초대 이사장 장익룡 서광 회장이 맡고 있던 그 시점이다. 직물제 의류와 메리야스, 스웨터를 중심으로 섬유제품 수출이 승승장구할 때다.

섬유 쿼터제가 시행될 때는 사실상 셀러스 마켓이 되어 공급자가 시장 지배권을 장악했다. 섬유 쿼터가 바로 돈이기 때문에 수출업체들마다 재산권인 쿼터 확보에 혈안이 돼 있을 때다. 당시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중견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에서 대우그룹 성장 동력 배경을 묻는 질문에 “섬유 쿼터로 1년에 1,000억 원씩 벌었다.”고 실토할 정도였다.

당시 아크릴 스웨터가 폭발적으로 수출되면서 89년 당시 대미 합섬 스웨터 쿼터량이 370만타에 달할 때다. 전년 도인 2008년도에 아크릴 스웨터 수출이 5억 8,000만 달러에 달했고 이 중 70% 이상이 대미 수출로 얻은 실적이었다.

다른 의류 제품도 마찬가지이지만 직물제 의류 중 재킷, 드레스 셔츠, 블라우스, 바지 등이 황금 쿼터이었고 니트 셔츠 중에는 쿼터량이 작은 면니트셔츠(CAT338.9) 쿼터 차지가 금값이었다. 합섬니트 셔츠(CAT 638.9)는 대미 쿼터량이 600만 타 이상이었지만 지금과 같은 인기는 없었다.

당시에는 대게 스웨터 수출이 활발하면서 관련 업계가 승승장구했다. 한국뿐 아니라 스웨터 대량 수출국가인 대만, 홍콩산 스웨터도 한국과 경쟁하며 잘 나갔다.

이같이 스웨터 산업이 수직 상승하는 사이 예기치 않은 경천동지할 대사건이 불거졌다. 바로 미국 편직제 의류 및 운동복 제조 조합이 USTR(미국무역대표부)에 한·홍콩·대만 3국 스웨터 수출 업체를 반덤핑 협의로 제소한 것이다.

한일·신원·천지·영우·유림 5社 강도 높은 조사

득달같이 미국 측으로부터 한·대만·홍콩 3국 스웨터 수출업체가 미국 측으로부터 조사를 받기 시작했고 한국은 한일합섬 · 신원통상(현 신원)· 천지산업, 영우통상, 유림통상 5개사가 대표로 정밀 실사를 당했다. 제소자 측이 한·대만·홍콩 3국 산 스웨터가 저가로 대량 반입돼 자국 산업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대미 수출량이 가장 많은 한국을 타깃으로 삼으면서 대만·홍콩을 끼워 넣었다.

이 과정에서 재빠르게  ITC(미국제무역위원회)가 덤핑 협의가 있다는 예비판정을 내리자 미 상무부가 1차 덤핑 마진율 예비 판정을 내렸다.

다행히 덤핑 마진율 예비 판정에서 한국이 1.17%, 홍콩 5.9%, 대만 25.2%를 때려 그나마 한국은 유리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비판정일뿐 본 판정에서 덤핑이 인정돼 보복관세를 맞으면 대미 스웨터 수출을 사실상 포기하고 백기 투항할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 이어졌다.

미 상무부가 국내 5개 업체에 낸 조사 설문서에는 회사 조직부터 매출액 등 일반 현황은 물론 스웨터의 바느질 콧수 등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낱낱이 파헤친 데다 설문서 제출시일을 촉박하게 잡아 회사마다 이를 만드느라 매일 야근으로 뜬눈으로 새우기 일쑤였다.

아예 한국의 대미 스웨터 수출에 싹을 자르겠다는 서슬 퍼런 자세였다. 이들 5개사의 설문서 답변서에 조그마한 허점이 있으면 무차별 덤핑 관세의 보복 관세를 부과할 작정으로 일관했다. 한일, 신원, 영우, 천지, 유림의 답변서에 하자가 있으면 이를 전체 145개 한국 스웨터 수출  업체에 적용해 싸잡아 도매금으로 초토화시킬 작정이었다.

이같은 살벌한 상황이 이어지자 미국 바이어들은 한국산 스웨터의 고마진 보복 관세 부과를 점치고 한국에서의 스웨터 수입을 제3국으로 대거 전환했다. 당장 반덤핑 조사가 본격 시작된 첫해인 90년도 스웨터 쿼터 소진률이 20% 남짓에 불과했다.

각사가 패널티를 피하기 위해 황금 같은 쿼터를 너도나도 조합에 반납하는 웃지 못할 현상이 발생했다. 한국의 스웨터 수출은 사실상 끝장이라는 분위기에 전 업계가 전전긍긍한 모습이었다.

 

신원 박성철 회장

박성철 대책 위원장의 통찰력 · 추진력 명중

그러나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대역전 전략이 우리 업계 내부적으로 치밀하고 적극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섬유제품수출조합 스웨터 위원장인 박성철 회장을 비상대책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5개 업체 대표가 위원으로 참여하며 미국 측의 반덤핑 제소 공세를 무력화시키는 작업이 주도 면밀하게 진행됐다.
신원 박성철 회장 주재로 5인 대책위원회는 당시 조합 유기재 상무와 주상호 부장의 사무국을 동원해 4년여를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대책 회의를 열었다. 우선 미국 상무부의 조사 답변서 작성에 따른 미국의 대표적인 초대형 로펌 두 곳을 선정했다.

당시 미국 변호사인 전성철 현 세계경제연구소 이사장이 소속됐던 미국의 대표적인 로펌 중의 하나인 리드앤프리스트와 삼정회계법인 회장을 역임한 윤영각 미국 변호사가 소속된 시드니앤오스틴 로펌과 계약하고 철저하게 대응했다. 한국에서는 글로벌 업무 능력이 가장 뛰어난 삼일회계법인이 당시 모든 조사 회계 자료를 실시간으로 작성해 제공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탁월한 능력과 통근 결단력의 소유자로 알려진 박성철 회장은 89년 말 대형 미국 로펌과 계약한 데 따른 거액의 선임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수출외형 기준으로 52억 원에 달하는 거액의 기금을 각출했다.
당시 한국 기업들은 컴퓨터가 제대로 마련되지 못해 수작업으로 밤을 낮 삼아 일을 했고 삼일회계법인이 이를 수집해 매일 미국 로펌에 제공했다. 낮과 밤이 다른 양국 시차로 인해 미국 로펌이 요구한 자료를 아침에 받아 대책위원회에서 검토하고 이를 삼일회계법인 주도로 작성해 미국 로펌에 보내는 신산고초를 4년간 계속해왔다.

당시 대미 스웨터 수출 반덤핑 제소로 대책위원으로 활약했던 업계 대표 중 박 회장을 제외한 4인 모두 타계했거나 은퇴해 현역에서 사라졌으나 이들의 끈질긴 집념과 용의주도한 전략은 결국 미국 정부가 최종 무혐의 처분을 내리는 승소 판결을 받아 낸 치밀한 전략가들이었다.

결국 덤핑 혐의가 있다·없다를 놓고 몇 차례 판결 번복과 제소자 측의 항소·기각의 우여곡절을 거쳐 지난 94년 4월 급기야 ‘한국산 스웨터 미국 산업 피해 없음’으로 최종 판정을 받아 무혐의를 입증했다. 미국 정부를 상대한 4년여 동안 피말리는 고통의 세월이 마감되는 승소 판결을 받아낸 것이다.

반면 대만과 홍콩은 반덤핑 행위가 고스란히 인정 돼 최고율의 반덤핑 관세를 얻어맞고 대미 스웨터 수출에 사실상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대만·홍콩도 각기 미국 변호사를 선임하고 열심히 대응했지만 한국 업계에 비해 대응 능력이 크게 뒤진 원인이다.

누가 봐도 반덤핑 행위를 벗어날 수 없는 악조건에서 무혐의 승소 판결을 받아낸 데는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활약한 박성철 회장의 뛰어난 통찰력과 과감한 결단력, 추진력이 밑바탕이 된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당시 대책위원장으로 활약했던 전 유림통상 이상만 사장은 “박성철 회장의 끈기와 리더십, 지혜로움이 승소를 가져왔다.”고 당시를 회고하며 박 회장의 노고를 높이 평가했다. 그런 탁월한 지도자를 섬유 업계는 “오래 오래 기억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또 값진 승소를 쟁취하기까지는 스웨터 수출 반덤핑 제소로 4년여간 고통을 받은 업계의 치열하고 인내력 있는 노력만이 아니었다. 당시 상공부 통상국 리더들이 서울과 워싱턴에서 무혐의 판정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 점 또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당시 김철수, 김선길, 유호민, 유득환, 노진식 씨 등 상공부 전현직 통상국장들과 워싱턴 상무관 이희범 씨, 홍석우 씨 등 관료들이 업계 입장에서 승소를 이끌어 내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 결과였다.

한국산 스웨터의 대미수출 반덤핑 제소에서 승소한 대역사의 쾌거는 단순한 스웨터 업계의 승리로 자축할 소극적인 평가가 아니었다. 만약 스웨터 덤핑제소해서 패소했다면 덩달아 한국산 직물제 의류와 메리야스에게도 덤핑제소 가능성이 매우 농후했다.

이같은 우려 속에 스웨터 덤핑 제소가 승소하자 추가적인 덤핑제소를 의식해 대한 의류 수입을 기피하던 미국의 백화점과 크고 작은 스토아 몰에서 일제히 한국으로 오더를 집중하는 연쇄 반응이 생겼다. 한국 스웨터 업계의 무혐의 처분으로 보아 한국의 섬유 수출 관리 능력과 통상 대응 능력을 바이어들이 높이 평가한 결과다.

정부, 업계 단체 합작 승리 · 지금은 그런 모습 안 보여

결국 이것은 비록 국내 제조업 환경이 갈수록 어려워져 해외 소싱 기지로 탈출했지만 그 주종이 니트 의류로 이어져 승승장구할 수 있게 한 큰 동기부여가 됐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스웨터가 생산성에서 니팅기(다이마루)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지고 가격이 비싼 단점으로 급격히 쇠락했지만 스웨터 수출이 구축한 바이어 네트워크를 니트 의류가 계승할 수 있었다. 더불어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스웨터보다 니트 의류의 트렌드가 대세를 이룬 것도 변화의 원인임을 부인할 수 없다.

당시 스웨터 수출의 무혐의 승소는 정부의 통상 정책에도 하나의 지침서가 될 정도로 많은 파급 효과를 나타냈다. 스웨터 반덤핑 제소에 대응하는 통상 전략이 매뉴얼화됐고 훗날 한국산 철강 제품 반덤핑제소 때도 이를 근거로 대응해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다.

박성철 회장은 이같은 업계의 절체절명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한 탁월한 지도자의 덕목을 자타가 공인해 훗날 한국의류산업협회장과 한국섬유업계 수장(首長)인 한국섬유산업연합회장을 6년간 맡아 업계 발전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경주했다.

지난 81년 무역의 날에 스웨터 수출 업계에서는 사실상 최초인 급탑산업훈장을 수상한 것도 평소 탁원한 경영 능력은 물론 자기희생적인 봉사 정신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섬유 쿼터제를 활용해 승승장구하던 국내 스웨터 산업이 벼랑 끝에 몰렸을 때 보여준 업계와 정부의 차돌 같은 단단한 공조와 지원이 지금은 왜 산업 정책에서 이뤄지지 못하는지 아쉽고 안타까울 뿐이다.

뜬금없이 이미 역사가 된 30년 전 섬유 수출 비화의 에두룰 수 없는 역사의 팩트(fact)를 소개한 것은 공멸 위기의 ‘주식회사 한국 섬유산업’을 기사회생시키기 위해 지난날처럼 업계와 단체·정부의 공조를 다시 채근하기 위한 것이다. <조영일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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