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으로 불리는 글로벌 우정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 적이 되는 것이 냉엄한 국제 정세다. 어폐가 있지만 그동안 지소미아를 둘러싸고 동맹을 넘어 혈맹인 미국이 노골적으로 일본 편을 든 것으로 비쳐졌다. 과거사 문제를 경제보복으로 무기화한 원인 제공의 일본을 설득하기보다 비수를 맞은 한국 보고 백기 투항하란 식이었다.

외교는 국가의 자존심이다. 일본에게는 가위바위보를 해도 져서는 안 되는 것이 국민감정이다. 아무리 고약한 지정학적 약점과 수출주도 경제의 아킬레스건을 쥐고 있다 해도 미국의 전방위 겁박은 옳은 태도가 아니었다. 우리 국민의 절대다수는 일본에 무릎 꿇고 백기 투항하느니 경제적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꿋꿋이 사는 것을 원한다.

하지만 국가 안보와 경제적 실리가 걸린 중차대한 사안에 자존심만 내세울 수 없는 것 역시 부인 못 할 사실이다. 국가와 개인 불문하고 때로는 명분보다 실리를 택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일 수 있다. 이같은 대전제에서 청와대가 22일 밤 고심참담 끝에 지소미아 종료 통보를 정지한 것은 현명한 판단이다. ‘오는 방망이 가는 홍두깨’가 정석이지만 동맹인 미국의 압력을 외면할 수 없고 실리 면에서도 지소미아를 살리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포에버21’ 법정 관리 피해 일파만파

본질 문제로 들어가 재미교포의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했던 ‘포에버21’이 ‘챕터11’(기업회생절차)에 들어가면서 국내외 거래 업체들의 피해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본지 11월 18일 자 3면 머리기사에 실린 「‘포에버21’에 한국 벤더 14社 900억 물렸다」는 제하 기사를 보고 당사자뿐 아니라 섬유의류 관련 업체들의 관심과 문의가 빗발쳤다. 많은 독자들이 피해 규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피해 업체 14개사가 자기 회사와 직접·간접 거래하는 회사인지 확인했다. 독자 문의자 중에는 자신의 기업도 “돈을 못 받았는데 왜 명단에 없느냐”고 따지기도 했다.

이는 무담보 고액 채권자 중 최소 200만 달러 이상 고액 채권이 잠긴 50개사만 공개했을 뿐 200만 달러 미만 채권은 명단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그만큼 200만 달러 미만 무담보 채권자 수가 많다는 얘기다. 의류  벤더와 원단밀을 포함해 수많은 한국 섬유의류 업체들이 납품 대금을 못 받아 고통스럽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 L&C코퍼레이션의 200만 달러에서 1,340만 달러의 KNF인터내셔날에 이르기까지 고액이 잠긴 피해 업체 중 자금력이 약한 일부 회사는 벌써부터 악성 루머가 나돌고 있다. ‘포에버21’의 기업 회생 절차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질지 여부도 낙관하기 어려운 데다 된다 한들 기약할 수 없는 긴 세월에 어느 수준 회수할지도 모를 상황이다. 가뜩이나 침체된 글로벌 경기 위축과 제조원가 상승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납품한 거래 업체들이 ‘호박씨 까서 한 입에 털어 먹힌꼴’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 국동 같은 힘 있는 상장 기업은 ‘포에버21’에 잠긴 채권을 벌써 3분기 실적 결산에 손실로 털고 넘어가는 순발력을 보였다. 자금력이 탄탄한 국동 같은 회사는 채권을 회수하면 그때 가서 수익으로 반영하겠지만 오래전부터 수출 보험도 기피당한 ‘포에버21’과 거래한 기업 상당수가 위기를 겪을 것으로 우려되는 상황이다.

‘포에버21’의 ‘챕터11’을 진행 중인 미국 연방파산법원이 공개한 자료와 정통한 미국 업계 소식통에 따르면 38년 전 무일푼으로 시작해 세계 100대 부호로 성공한 장도원·장진숙 부부의 경영행태는 그동안도 많은 의문 부호를 제기해왔다. 사실 ‘포에버21’의 파산설은 5년 전부터 파다하게 나돌았다. 그러나 개인 재산이 4조 원대에 달한다는 소문에도 불구, 축재 과정은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아 온 것도 사실이다.

파산설이 나돌 때마다 펄쩍 뛰며 부인해온 장 씨 부부는 지난 9월 파산보호신청이란 극약 선택을 하면서 아메리칸 드림의 화려한 명성을 뒤로하고 악덕 기업이란 불명예를 안고 말았다.

그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700개 매장을 운영하면서 2018년 기준 34억 달러(3조 8,000억 원)의 매출을 올려 글로벌 SPA 브랜드로서 승승장구했다. 계열사도 6개에 이른다. 축재의 비결은 의류유통의 허점인 자기 돈 안 들이고 손쉽게 남의 돈으로 장사하는 수완이 탁월했다는 지적이다. 한국을 비롯한 크고 작은 의류 벤더들로부터 외상으로 의류를 공급받고 이를 팔아 수개월 동안 잠가 놓은 후 ‘쥐 소금 먹듯’ 조금씩 갚아 나갔다는 것이다.

심지어 번 돈은 장 씨 부부가 세운 교회에 넣어 세금도 내지 않고 재산을 불렸다는 설도 파다하다. 물품 대금을 갚는 거래 관계가 미끄럽기 짝이 없고 고래 심줄처럼 질기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한때 대규모 거래를 유지했던 세아상역도 이 때문에 거래를 포기한 지 오래다. 그럼에도 이번 14개사 한국 피해업체 중에 포함돼 아직도 281만 달러의 미회수채권을 갖고 있다.

알다시피 ‘포에버21’ 측은 부인했지만 지난해 윤광호 회장의 광림통상이 떡쌀 담근 원인도 납품 대금을 제때에 못 받는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알려졌다. 남의 돈으로 장사하고 남품 대금은 ‘배 째라’며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 거래 업체들은 피 말리는 자금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수많은 기업들이 거래를 지속하는 것은 공장 가동을 유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해외에 대규모 소싱 공장을 가동하고 있는 의류 벤더들은 결제가 지연되더라도 매출 규모가 큰 빅 바이어를 쉽게 놓치기 어려운 것이다. 소문은 오래전부터 나돌았지만 개인 재산이 수조 원에 달한다는 소문을 믿고 설마하며 거래해 온 것이다. ‘챕터11’에 들어간 9월 9일 이후에도 많은 기업들이 원금 회수를 기대하며 거래를 지속하고 있다.

연 매출 41억 불 세계 100대 부호의 추락

‘포에버21’은 6개 계열사를 전부 포함해 기업회생절차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강수 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있다. 동남아와 남미에 있는 매장은 전부 문을 닫았고 미국 내 알찬 매장만 남기고 모두 폐쇄하고 있다. 내년 매출을 23억 달러로 축소하고 재기에 올인하고 있다. 9월 1일 이후 납품 대금은 파산 법원의 명령에 따라 선적 확인 후 45일 안에 현금결제 되고 있어 벤더들이 거래를 지속하고 있다.

미국에 무일푼으로 정착해 신산고초 끝에 한때 연 매출 41억 달러를 달성하면서 2011년 포브스 선정 ‘세계 100대 부호’에 올랐던 장 씨 부부는 이제 악명 높은 기업인으로 추락했다. 파산 법원에 제출한 채권자 리스트가 2,364페이지에 채권자 수가 10만 명에 달한다는 소문 속에 거래 업체들마다 피해를 입지 않은 기업이 드물다는 악평이 돌고 있다. 무담보 고액 채권자 14개사뿐 아니라 200만 달러 미만 피해자도 연쇄 피해를 어떻게 감당할지 걱정이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비가 오면 무너지고 부도덕한 기업은 영원할 수 없다는 진리를 ‘포에버21’이 다시 일깨워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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